2020 3 16 사순제3주간 월요일

미사지향
연미사: 지하수실비아
생미사: 탁현수요셉(감사) 김진우대건안드레아 김진배사도요한 서동철 프란치스코 윤성현(가정)
레지오 단원

말씀요점
2열왕 5,14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시편 42
“제 영혼이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 가서 뵈오리이까?”

루카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4,24)

짧은 강론
‘판단’(judgment)과 ‘식별’(discernment)은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이 옳고 그런지에 대하여 ‘식별’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판단’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식별은 사람들의 외적 조건이나 행위에 대하여 최종 판단을 유보하고 그 사람 내면에 흐르는 선과 악의 실체를 관찰하고 이를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판단은 우리 안에 이미 형성된 선입견이나 윤리적 기준으로 구분지어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즉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흑과 백의 논리로 사람을 평가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성에서는 ‘영적판단’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고 ‘영적식별’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고향 사람이나 바리사이, 그리고 율법학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항상 예수님을 판단하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저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판단한다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신분적 정통성과 율법의 자구에만 매달린 해석으로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결국 그분 안에 드러난 온전한 사랑과 선의, 그리고 구원행위마저도 배척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고향사람들은 그들의 선입견에 갇혀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인간의 식별 없는 판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진영논리, 내편은 좋고 상대편은 나쁘다는 흑백의 논리는 식별이 없고 판단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숨은 이기심과 탐욕, 왜곡된 신념들이 판을 치면서 가짜뉴스라도 내편이면 좋은 것이고 선으로 둔갑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사회 안에 숨겨진 이런 악을 깊이 식별하고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미성숙과 무지는 쉽게 악의 편이 됩니다. 그래서 선과 악을 구분하고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기도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도봉산 성당 전원 바르톨로메오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