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19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미사지향
연미사: 김상곤요셉(기일) 이정진
생미사: 하애란세실리아 전호성야고보 이영주마르타 한순남말지나(감사) 윤성현(감사) *레지오 단원 *제대회 회원 *코로나로 고통받고있는 이들을위해

말씀요점
사도 2,42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시편 118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네. “

1베드 1,8-9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하고…믿기에…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0,25)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0,29)

짧은 강론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로마보다도 오래오래 영원히 계속되는 게 무엇인가?”예수님이 대답합니다. “그 사람들의 인생에 내가 닿은 흔적,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스치면서 남긴 흔적. 그것은 소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엔도 슈사쿠가 쓴 『사해 부근에서』라는 책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예수님은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무능한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절박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그저 그들과 늘 함께하실 뿐, 어떤 치유를 행하여 구제하지 못하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떠나고, 심지어 제자들마저 이런 예수님을 보고 돌아서 버립니다. 그런데 그 무능한 예수님을 잊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의 슬픈 인생에 다가가 남긴 사랑의 흔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체험합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 토마스만이 예수님을 만나 뵙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토마스가 원하는 것은 부활한 주님의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의 손과 발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 싶어 합니다. 오로지 그는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그 흔적’을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토마스는 왜 죽음을 이기신 부활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만 뵈어도 될텐데 그분의 십자가 상처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 십자가의 상처, 우리가 흔히 말하는‘십자가의 오상’은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인생에 스친, 인류가 잊지 못할 ‘사랑의 흔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힘과 능력만을 기대하면서 살면 이내 우리 믿음은 실망에 빠지고 맙니다. 병들면 낫게 해주고 필요한 것 채워주는 분으로, 즉 우리가 안고 사는 고통스런 문제의 해결사로서만 주님을 대하면 결국은 우리 신앙은 오히려 얕아질 수 있습니다. 엔도 슈사쿠 저자가 이 소설을 통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도, 우리가 ‘주님의 능력’에 믿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믿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어려움, 나의 고통에 대하여 늘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을 나누고 그분과 함께 죽어서 그분 부활의 능력을 깨닫기를 기다리십니다.(필립 3,10 참조) 그리고 마침내 우리도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도 그분처럼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남길 것은 재산도 명성도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남긴 사랑을 깊이 깨닫고 우리가 만난 인연, 한사람 한 사람에게 ‘사랑의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부활한 우리들의 얼굴입니다.(전원 신부, 「말씀의 빛 속을 걷다」에서)